KIM HONGHEE
화제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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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HONGHEE
화제의 작가
<<사진 잘 찍는 법>>
66, 공적 다큐멘터리와 사적 다큐멘터리
우리는 거시 담론에 익숙한 듯합니다. 민족이니 이념이니 정치니 경제니 하는 문제로 우리들의 삶을 가끔 송두리째 쏟아 붓습니다. 특히 선거철이나 되면 우리는 친밀한 친구들과도 정치 이야기로 마음을 상하기도 합니다. 가족이 모였을 때도 정치나 종교 이야기는 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가족도 있습니다.
거시 담론에 상응하는 말은 미시 담론입니다. 대단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여기에 속 합니다. 예를 들어 ‘이상’의 ‘날개’같은 사소설이 여기에 해당 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개인의 삶을 이야기 하는 듯 하지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때 식민지 조국 앞에 무기력한 지식인의 삶을 그렸다고 배웠습니다. 한 개인의 이야기가 우리 민족 지식인들의 무기력에 대해 은유했다는 것이지요.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은 어떻습니까? 그 역시 님은 잃어버린 조국이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거시 담론은 사진에서 공적 다큐멘터리에 해당 됩니다. 그러나 이상의 날개나 한용운은 님의 침묵은 미시 담론에 해당 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거시 담론을 다룬다고 해서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미시 담론이 그 역할을 더 증폭 시킬 수도 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는 공적 다큐멘터리가 득세를 하는 양상입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이고 페이스 북 시대입니다. 이전에는 홈피나 블러그가 사람을 불러 모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5일 장날에 모이듯 매일 같이 페이스 북 같은데서 모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 같이 크거나 작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확성기를 다 들고 있습니다.
목소리가 크거나 내용이 있거나 재미있는 사람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다양성이 존중 받는 사회가 된 것이지요. 이 다양성은 공적 담론을 다루기도 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다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 번 잘 살펴보십시오. 요즘의 페이스 북 같은 sns는 공적인 이야기 보다 사적인 이야기를 올리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글에 사람들이 환호 하거나 ‘좋아요’를 누룹니다. 이것은 대단히 사적이고 개인적인 이야기이지만 사진으로 치면 사적 다큐맨터리가 득세를 하는 양상을 보여 줍니다. 저는 저와 함께 공부하는 ‘사진 집단 일우’ 친구들에게 앞으로는 사적 다큐멘터리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고 공언 합니다.
왜냐하면 사회가 먹고 살기 힘들고 한쪽으로 편향되거나 살기 힘들어지거나 전쟁이 나거나 하면 공적 다큐멘터리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으로 사회를 바로 잡아야 할 기능에 작동 하니까요. 그런데 먹고 살만하고 사는데 여유가 생기면 예술이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럴 때 등장 하는 다큐멘터리가 바로 사적 다큐멘터리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시간을 보면 겨우 몇 십 년 전과 현재는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현격한 차이를 보입니다. 이전에는 경제는 물론 정치적인 안정도 안 되어 누구나 정치적 참여를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는 생활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우리들을 위협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경이로울 만큼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국민들도 현명해 졌습니다. 정치권의 속셈이 놀아나지 않을 만큼 되었고-여전히 불안하기는 하지만-경제적인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 되었습니다. 이전이 생존의 문제가 우리의 숙제였다면 이제는 생활을 질을 어떻게 향상 시킬 것인가가 실로 우리들의 숙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의 구성원은 거시 담론 보다 미시 담론, 즉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합니다.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고-여전히 못 미친다고 격렬하게 투쟁을 주장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경제적으로 내일의 밥거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면 인간은 유희 하는 동물입니다. 인간을 요즘은 ‘호모 루덴스’라고 부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광화문의 촛불이나 태극기 부대보다 개개인의 변화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그런 사람들에 의해 미시 담론이 득세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진에서는 당연히 사적 다큐멘터리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되지요.
촛불이나 밀양 송전탑을 다루기 위해 많은 사진가들이 현장으로 나섭니다. 그리고 발표되는 사진의 양도 엄청 납니다. 이상의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은유와 비유로 사소설을 쓰듯이 우리 시대는 예술성이 높은 사적 다큐멘터리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시점에 와 있다고 저는 생각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이 시대가 원하는 새로운 논법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이슈를 따라 수많은 사진가들이 몰려다니는 시대를 떠나 개인적이고 대단히 사적이지만 그것의 공통분모가 세상의 모순을 가리키고 개선을 도모합니다. 시대나 사회 문제의 영향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지대한 영향을 탐구하는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이 시대에 당연한 귀결이라고 저는 생각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우리가 한 번 짚고 넘어 가야 할 것은 거시 담론, 다시 말해 공적 다큐멘터를 다루는 사람만이 사회적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작가가 사회 참여를 하는 작가이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존경받아야 한다는 것은 편협한 생각입니다. ‘이상’이 사회적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인정받고 존경 받습니까?
대단히 사적인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도 사회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으며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사진가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경쟁하듯 어떤 사건이나 사태를 취재하는 것도 좋은 현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고요히 자신의 문제를 다루면서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다고 해서 사회 운동에 참여를 하지 않는다고 말 하기는 어렵습니다.
공적 다큐멘터리는 사회를 바꾸는데 일조를 하고 사적 다큐멘터리는 그런 것에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판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우리는 공적인 문제를 다를 수밖에 없는 시대를 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이야기를 통해 사회 전반을 다룰 수 있는 시대가 이전에는 없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새 술은 새 포대에 담으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개인적이고 대단히 사적인 다큐멘터리가 보다 강력한 사회 변혁을 주도할 시대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카메라를 사회를 향해 있습니까? 자신을 향해 있습니까?
화욜일 서울에서 막차로 부산 와서 집에 갔더니 한 시가 넘었었습니다. 그리고 수요일 아참 3시간 남짓 자고 라오스로 왔습니다. 비엔티안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방비엥을 거쳐 포장이 안 된 흙길을 달려 루앙 프라방에 와 잇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중에 타이어가 빵구 난 친구, 물을 오토바이로 건너지 못해 제가 대리 운전도 하고 길이 없어져 불도저가 밀고 있는 흙더미를 넘어 오다가 넘어진 친구. 또 절대 갈 수 없다고 해서 대리를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호텔에서 식사를 하는 바람에 소주가 없어 마시지를 못해 오늘도 한 줄 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좋은 밤 되시길요.^^